유작
창암 이삼만선생은 누구인가?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다. 자는 윤원(允遠; 允元), 호는 창암(蒼巖) 또는 강재(强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초명은 규환(奎奐; 奎煥; 奎桓)이며, 조부는 이우회(李友檜)이고, 부친은 장사랑을 지낸 이지철(李枝喆)이다. 이름을 삼만(三万; 參晩; 三萬)으로 쓰기도 했다. 모친은 김해김씨로 김정휘(金貞輝)의 딸이다.평생 관직이 없이 서예 연마에 힘써 일가를 이룬 대표적 서예가이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으며, 일찍이 베를 빨아서 글씨를 쓰고, 베가 까맣게 되면 빨아서 다시 연습하였고 병중에도 날마다 천 자씩을 쓰면서, 벼루 세 개를 뚫을 때까지 먹을 갈아 연습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한대 이전의 글씨를 흠모하면서 중국의 이왕(二王) 등 여러 서가를 참고하고 우리나라 서예의 대가인 김생 · 한호 · 백광훈 · 양사언 · 이광사의 글씨를 본받으며 독자적인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를 창안하였다. 선생은 전주에서 활동한 서예가로서 전라도의 멋과 흥취를 잘 살렸다는 평을 들었다. 서울의 김정희(金正喜) · 평안도의 조광진(曹匡振)과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명필로 일컬어진다.
제주도로 귀양가는 김정희가 전주를 거칠 때 상면하였고, 이어 1848년 김정희가 귀양에서 풀려나 상경하는 길에 전주에 들려 재차 보려하였으나 이미 죽은 후였다. 이때 김정희는 '명필창암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李公三晩之墓)'라는 묘표와 '공필법관아동노익신화명파중국제자수십인일상시습역다천명우세취계제자위후(公筆法冠我東老益神化名播中國弟子數十人日常時習亦多薦名于世取季弟子爲后)'라는 음기를 써주었다. 제자들 지도에도 각별하였으며, 손수 펴낸 필첩과 서첩을 사용하였다. 1800년 전주에서 중국 서예가 세 사람과 조선 서예가 세 사람의 글씨를 수집하여 편찬한 『화동서법(華東書法)』) 목판본을 발행하였다.
회갑을 맞아 서예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여 펴낸 『창암묵적(蒼巖墨蹟)』은 '연비어약(鳶飛魚躍)' 4자와 중국 역대 대가들의 글씨를 임서(臨書)하거나 방서(倣書)하여 엮었다. 1840년에 저술한 『창암서결(蒼巖書訣)』에서는 서두의 총론에서 "서법은 자연에서 시작된다"라고 하였고, 선건묵(先乾墨)과 게완하는 법을 강조하였다. 또 영자팔법(永字八法)과 서체 · 서가(書家) · 결구(結構) · 집필(執筆)법을 기술하고 말미에는 「논습자지필(論習字紙筆)」을 실었다. 자연에서 서법이 시작된다고 보았으며 서법의 최고 경지는 일운(逸韻)으로 보았다. 또한 다양한 토속적 재료를 발굴하고 서법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여 조선의 한지의 사용 이외에도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고, 모필도 황모 뿐 아니라 앵모필 · 족제비털 · 갈필 · 면필5) 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제자로는 서홍순(徐弘淳)과 모수명(牟受明)이 대표적이다. 대구의 서예가 서석지(徐錫止)의 『필감(筆鑑)』 서문에 그가 11살(1839) 때 이삼만에게 배웠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지방에 여러 제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묵적은 대체로 서첩이 많고, 각종 편액과 금석문이 호남지방을 위시하여 영남 · 호서지방의 사찰과 고루(高樓) · 정사(亭舍)에 남아 있다. 편액글씨는 전남 구례 화엄사의 <삼전(三殿)>, 천은사의 <보제루(普濟樓)>와 <회승당(會僧堂)>, 선암사의 <열선당(說禪堂)>, <만세루(萬歲樓)>, <팔상전(八相殿)>, 대흥사의 <가허루(駕虛樓)>, 전남 송광사의 <대감정(大鑑亭)>, 정읍의 <부무실(富武室)>과 <죽심하정루(竹深荷淨樓)>, 옥구의 <사우당(四友堂)>, 임실 상이암의 <칠성각(七星閣)>, 임실 신흥사의 <산신각(山神閣)>, 임실 오수의 <삼계정사(三溪精舍)>와 <신포정(薪浦亭)>, 강화 전등사의 <원통각(圓通閣)>, 고창 강신홍이 소장한 <계산청치(溪山淸致)>와 <임지관월(臨池觀月)>, 전주의 <관수세심(觀水洗心)>, 금산 보석사의 <대웅전(大雄殿)>과 <기허당(騎虛堂)>, 하동 칠불암의 <칠불암(七佛庵)>, 해남 용문사 일주문의 <호구산용문사(虎丘山龍門寺)>, 동학사의 <동학사(東鶴寺)>, 정읍 감곡 동래정씨 효열비각의 <효열문(孝烈門)> 등이 있다.
주련글씨가 갑사 진해당(振海堂)과 정읍 산내 노휴당 등에 전하고 있다. 비문으로는 김정희와 이삼만이 합작한 완주군 용진면에 위치한 <정부인광산김씨지묘(貞夫人光山金氏之墓)>와 완주군 봉동읍에 <동지중추부사김양성묘(同知中樞府事金養誠墓)>의 글씨가 전한다. 이 밖에 유한지와 이삼만이 합작한 완주 용진의 <전주최씨성철지묘(全州崔氏性喆之墓)>와 전주 중화산동의 <전주최씨효자각(全州崔氏孝子閣)>에 글씨가 전한다. 이 밖에 유한지와 이삼만이 합작한 완주 용진의 <전주최씨성철지묘(全州崔氏性喆之墓)>와 전주 중화산동의 <전주최씨효자각(全州崔氏孝子閣)>에 글씨가 전한다.
이삼만, 필적
전후면을 쓴 묘비로는 완주 용진의 <증가선대부공조참판 이공우계지묘(李公友溎之墓)>, 전주 색장동의 <학생전주이공우정지묘(學生全州李公友靖之墓)>, 정읍 감곡의 <유명조선열녀학생 송경화처동래정씨지려(宋慶化妻東萊鄭氏之閭)>, 금산 하옥의 <선원록낭청 풍천임공상록지묘(豊川任公相祿之墓)>, 진안 부귀의 <조양임공경수지묘(兆陽林公景秀之墓)>, 전주 남고산성의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 등의 글씨가 있다.임각자는 창암이 살았던 한벽당과 옥류동 최담유허비 근방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전서로 쓴 <백화담(百華潭)>, <풍수(風水)>, <월암(月巖)>, <취리한중건곤일월(醉裏閑中乾坤日月)> 등이 있으며 현재 유실되거나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비어약(鳶飛魚躍)>과 <옥류암(玉流巖)>은 초창기 필획으로 간주된다. 이밖에 전주 옥류동에 이삼만의 암각서 <영구음천(靈龜飮泉)>이 최담유허비 위쪽에 있다. 여기에는 낙관이 강재(强齋)로 표시되어 있다. 또 정읍 부무실의 <석담(石潭)>은 행서로 쓰고 하단 부분에 이삼만 낙관을 그려 새겼다.